헛개라는 이름은 오래전부터 마트와 편의점 음료 진열대에서 먼저 익숙했다. 병이나 캔에 담긴 헛개차를 보면 특별한 생각 없이 구수한 맛의 음료 한 병을 떠올렸다. 호기심에 몇 번 사 마셨을 때도 내게 헛개차는 둥굴레차를 닮은 맛에 가까웠다.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이 실제 나무와 꽃, 그리고 계절을 따라 익는 열매에서 왔다는 사실까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5월 마지막날, 약초를 함께 공부하던 지인과 연천의 헛개마을을 찾았다. 지인은 자기 동네에 헛개나무가 많아 헛개마을로도 불린다고 했다. 내가 그날 만난 것은 열매가 가득 달린 가을의 나무가 아니라,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 헛개나무였다. 평소 음료 이름으로만 알던 헛개가 가지 끝에 올라온 작은 꽃차례와 넓은 잎을 가진 나무의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날이었다.
5월 말, 꽃이 피기 시작한 헛개나무

마을 초입부터 헛개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나무에는 가을 열매가 매달려 있지 않았다. 잎 사이와 가지 끝에는 연한 초록빛을 띠는 작은 꽃차례가 모여 있었고, 가까이에서 볼수록 아직 단단히 맺힌 꽃봉오리와 막 피기 시작한 작은 꽃들이 함께 보였다. 멀리서 보면 그저 초록빛이 짙은 나무였지만, 가지 가까이 다가가니 잎 사이에 숨어 있던 꽃차례가 눈에 들어왔다.
헛개나무는 꽃이 한 송이씩 도드라지게 피는 나무라기보다, 작은 꽃들이 가지 끝과 잎겨드랑이 부근에 모여 있는 모습으로 먼저 보였다. 사진에 남은 것도 화려한 꽃잎보다 잎 사이에 모여 있는 초록빛 꽃봉오리와 꽃차례였다. 평소에 헛개라는 이름을 음료에서만 보았을 때는, 그 나무가 봄날 이렇게 작은 꽃들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마을에 헛개나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는 뜻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을 초입에서 헛개나무들을 보니, 헛개마을이라는 이름은 제품이나 간판보다 먼저 나무의 모습에서 이해됐다. 내가 본 것은 열매가 무겁게 달린 나무가 아니라, 넓은 잎 아래로 작은 꽃차례가 막 드러난 나무였다. 그래서 그날의 헛개는 음료의 원료보다 먼저, 5월 말의 초록빛 나무로 기억된다.
작년에 따 두었던 열매에서 느낀 단맛
꽃이 피기 시작한 헛개나무를 본 뒤에는, 지인이 미리 준비해 둔 헛개열매를 맛보았다. 그 열매는 그날 나무에서 바로 딴 것이 아니라, 지난해에 따서 말리거나 볶아 둔 것이라고 했다. 봄날의 나무에는 꽃이 있었고, 손에 든 것은 지난 계절의 열매였다. 한 나무의 현재 모습과 이전 계절에 거둔 열매를 같은 자리에서 함께 본 셈이었다.
헛개열매를 처음 맛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왜 이렇게 달지?”였다. 나는 헛개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편의점에서 마셨던 구수한 음료 맛을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말린 열매에서 느껴지는 단맛은 예상보다 또렷했다. 눈앞의 나무에는 이제 막 꽃이 피고 있었는데, 손에 든 열매에서는 지난 계절의 시간이 느껴졌다. 꽃과 열매가 같은 날 한 자리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계절에서 온 모습이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함께 참여한 다른 수강생들도 열매를 맛보며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게 정말 헛개열매냐”라고 되묻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헛개라는 이름 자체는 익숙하지만, 실제 열매를 손에 올려 보고 맛까지 본 경험은 흔하지 않았던 듯했다. 나 역시 음료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헛개를, 꽃이 핀 나무와 말린 열매를 통해 한꺼번에 만났다. 그래서 그날은 식물의 한 계절만 본 날이 아니라, 봄의 꽃과 지난해 열매가 겹쳐진 날로 남았다.
티백에서 이어진 지난 계절의 향
그날은 열매와 씨앗이 들어 있는 티백으로 만든 헛개차도 맛보았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사 마셨던 헛개 음료는 내게 구수한 쪽의 맛으로 기억돼 있었다. 그런데 그날 마신 차에서는 향부터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말린 열매를 먼저 맛본 직후여서인지, 향에서도 달게 느껴지는 인상이 남았다. 봄날 나무에서 본 것은 아직 열매가 아닌 꽃이었지만, 차를 마시는 순간에는 손에 들었던 지난해 열매의 맛이 함께 떠올랐다.
나무에 피기 시작한 꽃과 말린 열매, 티백 속 향은 서로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날 내게는 하나의 헛개 기억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전까지 헛개차를 마실 때 음료의 맛만 생각했다. 그러나 연천 헛개마을에서는 나무가 꽃을 피우는 시기와 열매가 남아 있는 시간이 다르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보게 됐다. 꽃차례가 올라온 가지를 본 뒤에 말린 열매를 맛보니, 차 한 잔도 단순히 병에 담긴 음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지인은 헛개잎도 차로 마신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그날 내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잎 이야기보다도, 잎 사이에 모여 있던 작은 꽃차례였다. 5월 마지막날의 헛개나무에는 꽃이 피기 시작했고, 내가 맛본 열매는 지난해에 미리 따 두었던 것이었다. 이제 헛개차라는 말을 들으면 음료 진열대보다 먼저, 연천 마을 초입의 넓은 잎과 초록빛 꽃봉오리, 그리고 손에 올려 보았던 말린 열매가 함께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