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명자는 어릴 때부터 이름을 많이 듣고, 밭에서도 어렴풋이 보았던 식물이다. 시골에서 자랄 때 가끔 결명자와 율무, 수수를 조금씩 심는 농가가 있었다. 우리 집은 따로 재배하지 않았지만, 동네 밭 한쪽에서 노란 꽃이 피고 자라는 모습을 본 기억은 남아 있다. 당시에는 그 식물이 결명자인지, 그냥 밭에 피는 노란 꽃인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른 뒤 약초 공부를 하며 결명자의 이름과 꽃을 다시 연결하게 됐다. 이제 결명자차를 마실 때면 차의 색보다 먼저 고향 밭과 그곳의 노란 꽃이 떠오른다.
결명자는 평소에는 차 이름으로 더 익숙했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밭의 작물로 먼저 남아 있다. 차를 끓이는 주방의 향과 흙이 보이던 고향 밭은 전혀 다른 장면처럼 보이지만, 결명자라는 이름 하나가 그 둘을 이어 준다.
시골 밭에서 보던 노란 꽃
시골에는 논과 밭이 가까이 있었고, 집집마다 심는 작물이 조금씩 달랐다. 어떤 밭에는 고추나 콩이 많았고, 어떤 곳에는 율무나 수수가 보였다. 결명자도 그런 작물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결명자를 많이 수확해 판매하려고 넓게 심었다기보다, 집에서 마실 차를 마련하려고 조금씩 기르는 농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내게는 결명자라는 말보다 밭의 높이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식물의 색이 더 먼저 보였다.
밭 한편에서 노랗게 피어 있던 꽃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꽃의 모양이나 줄기의 높이, 잎이 어떻게 달렸는지까지는 또렷하지 않다. 그래서 내가 본 모든 노란 꽃이 결명자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약초 공부를 한 뒤 결명자 사진과 설명을 보며, 고향 밭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전에는 이름 없이 기억되던 노란 꽃이 결명자라는 이름을 통해 다시 연결된 셈이다.
동네 어른들은 결명자를 수확해 말리고, 볶아 차로 마신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때 어른들은 결명자차를 마시는 이유도 함께 말했지만, 어린 나는 그 내용을 깊이 듣지 않았다. 차를 끓여 마시는 어른들의 생활 방식 가운데 하나로만 생각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며 밭길을 지날 때, 어떤 작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다만 집 근처에는 여러 식물이 자라고, 계절이 바뀌면 밭의 모습도 달라진다는 정도만 자연스럽게 알았다.
결명자는 콩과의 한해살이풀로 소개되며, 여름에 노란 꽃이 피고 가을에 꼬투리와 씨가 맺힌다고 한다. 내가 본 밭의 노란 꽃도 꽃이 피고 난 뒤에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꽃 이후의 모습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 씨앗이 어떻게 여물고 수확되는지보다, 길가에 있던 밭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더 익숙했다.
지금 돌아보면 결명자라는 이름은 차를 통해 먼저 알았지만, 실제 식물의 기억은 고향 밭에 남아 있다. 차를 마실 때 보는 갈색의 씨와 밭에서 보던 초록 줄기, 노란 꽃은 처음에는 전혀 다른 것으로 느껴졌다. 약초 공부를 하며 그 사이가 이어졌다. 그 연결이 정확한 식물 동정의 기억은 아니지만, 이름 하나가 오래전 풍경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율무와 수수처럼 키가 크거나 눈에 띄는 작물 사이에서, 결명자는 당시 내게 특별히 주목받는 식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느 계절이 되면 밭의 색이 달라지고, 노란 꽃이 보였다는 기억은 남아 있다. 지금은 그 꽃을 떠올리며, 예전에 지나던 밭길에도 내가 이름을 몰랐던 식물이 많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볶은 씨에서 나던 구수한 향
성인이 된 뒤에는 볶은 결명자를 구매해 물에 우려 마셔 본 적이 있다.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마시던 차라고만 생각했는데, 직접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결명자를 넣어 보니 다른 기억이 생겼다. 처음에는 물의 색이 조금씩 변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구수한 향이 올라오는 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완성된 음료를 사서 마시는 일과 다르게, 기다리는 시간이 함께 있는 일이었다.
내가 느낀 결명자차의 맛은 처음에는 구수한 쪽에 가까웠다. 물에 우려 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맛이 진해지고 쓴맛이 더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정도의 농도가 내 입에 맞는지 여러 번 마시며 알게 됐다. 같은 재료라도 물의 양과 우린 시간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나는 특별한 방법을 정해 두기보다, 너무 진하게 느껴지지 않는 정도로 마시는 쪽이 편했다.
한 번에 마시지 못한 물은 냉장고에 두었다가 나누어 마셨다. 그때는 따뜻한 물을 더해 내 입맛에 맞게 농도를 조절하기도 했다. 매번 새로 물을 끓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편했고, 바쁜 날에도 준비해 둔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이 경험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변화보다도 주방에 퍼지던 구수한 향과, 냉장고 안에 담아 둔 차의 색이다.
결명자는 차로 마실 때보다 밭에서 볼 때 더 낯선 식물처럼 느껴진다. 포장 안의 볶은 씨는 작고 단단하며 갈색이지만, 밭에서는 줄기와 잎, 꽃을 가진 한해살이풀로 자란다. 나는 결명자를 직접 길러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씨앗에서 식물로 이어지는 과정을 눈으로 본 기억도 없다. 다만 구매한 차 재료를 보며, 어릴 적 밭에 있던 노란 꽃을 함께 떠올리게 됐다.
결명자차는 내게 특별한 행사 음식이 아니라 일상에서 마셔 본 차 가운데 하나다. 물을 끓이고 향을 맡고, 진해진 색을 보며 식물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있다. 예전에는 결명자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른들이 마시던 차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시골의 밭과 노란 꽃, 볶은 씨가 함께 떠오른다. 같은 이름이 생활의 서로 다른 장면을 연결해 준 경우다.
포장을 열었을 때의 향과 뜨거운 물에 닿았을 때의 향도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마른 씨는 단단하고 조용한 재료처럼 보이지만, 물에 들어가면 색과 향이 서서히 퍼졌다. 나는 그 변화가 눈에 보이는 차를 좋아한다. 결명자도 마시는 순간보다, 물이 우러나는 동안 주방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기억에 남는 차였다.
이름을 알고 다시 떠올린 밭길
약초 공부를 하며 가장 자주 느끼는 것은, 새 식물을 많이 안다는 사실보다 예전의 풍경을 다시 보게 된다는 점이다. 결명자도 그렇다. 어린 시절에는 밭에서 노란 꽃을 보았고, 어른들은 차를 끓여 마셨다. 나는 그 둘이 같은 식물의 서로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이름과 식물의 정보를 읽으며, 고향의 밭길이 기억 속에서 다시 이어졌다.
결명자라는 이름에는 여러 별칭이 함께 소개되기도 한다. 식물의 이름은 하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자료를 찾아보면 지역과 기록에 따라 다른 이름이 따라붙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그 이름을 모두 외우지는 못한다. 다만 평소 쉽게 부르던 결명자라는 이름 뒤에도 식물의 분류와 재배, 차로 마시는 생활문화가 함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결명자에 관한 옛말이나 주변의 이야기를 지금의 몸에 적용하려 하지는 않는다.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은 밭에서 보던 노란 꽃의 기억과, 볶은 결명자를 물에 우려 마셨던 일이다. 어른들이 결명자차를 이야기하던 장면도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 말이 누구에게나 같은 의미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식물에 관한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두고, 내 글에서는 실제로 본 풍경과 생활의 장면을 중심에 두고 싶다.
나는 결명자를 직접 길러 본 적이 없고, 씨가 여무는 모습도 가까이에서 관찰하지 못했다. 그래서 화분에 심어 보겠다는 계획을 이 글에 덧붙이지 않으려 한다. 지금의 내게 결명자는 직접 재배해야 할 식물이라기보다, 이미 기억 속에 있는 밭의 풍경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름이다. 언젠가 고향의 밭길을 걷게 된다면 노란 꽃을 보며 잠시 멈출 수는 있겠지만, 그때도 먼저 확인하고 바라보는 편이 좋겠다.
결명자는 결국 내게 차 한 잔으로만 남지 않는다. 시골 밭에 심긴 작물들, 율무와 수수 사이에서 보았던 노란 꽃, 동네 어른들이 차를 마시던 모습, 주방에서 은은한 향이 나던 시간이 함께 붙어 있다. 예전에는 흘려들었던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과거와 현재의 장면을 이어 주는 식물 이름이 됐다.
어린 시절의 밭은 정확한 식물 이름을 배우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내게는 식물의 계절을 처음 보던 장소였다. 봄과 여름에는 잎과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씨와 열매가 남는다는 흐름을 그때는 말로 설명하지 못했다. 결명자라는 이름을 알고 난 뒤에는, 그때의 밭도 그런 변화가 이어지던 자리였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