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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꼴을 하던 들판에서 뒤늦게 떠올린 달맞이꽃

by jamkkum 2026. 8. 11.

달맞이꽃이라는 이름은 오래전부터 들었지만, 실제로 어떤 꽃이 달맞이꽃인지 제대로 안 것은 약초 강의를 들은 뒤였다. 교수님이 영상에서 식물을 직접 보여주시자 고향의 논두렁과 작은 하천가가 떠올랐다. 키가 크고 노란 꽃을 피우던 식물을 여러 번 봤는데, 그때는 이름을 몰랐다. 이제야 그 꽃이 달맞이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했던 풍경 하나에 이름이 붙으니, 예전 기억도 조금 다르게 이어진다.

 

이름을 알게 된 뒤에는 오래전 소꼴을 하러 다니던 들판도 전과 조금 다르게 떠오른다. 그때는 노란 꽃이 피어 있어도 소가 먹을 풀을 얼마나 많이 베어야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이제는 그 풀밭의 식물도 저마다 다른 이름과 이야기를 지닌 채 자라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두렁의 노란 꽃을 뒤늦게 떠올리다

꽃이 피기 전 달맞이꽃
꽃이 피기 전 달맞이꽃

고향 집에 갈 때마다 논두렁과 작은 하천 주변에는 키가 큰 풀이 많았다. 그 사이에 노란 꽃이 피어 있는 모습도 여러 번 봤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내게는 논둑과 밭둑에 피는 수많은 풀과 꽃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어느 꽃이 먼저 피는지, 줄기가 얼마나 큰지, 이름이 무엇인지를 따로 확인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길가에 피어 있는 노란 꽃이었다.

 

교수님이 영상에서 달맞이꽃을 설명하며 직접 모습을 보여주셨을 때, 머릿속에 있던 고향 풍경과 화면 속 식물이 겹쳤다. 이름만 알고 있던 달맞이꽃이 갑자기 낯익은 식물이 된 순간이었다. 고향에서 본 것이 정말 모두 같은 식물이었는지는 사진이나 표본으로 다시 확인한 것이 아니므로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논두렁에 우두커니 서 있던 키 큰 노란 꽃이 생각난 것은 분명하다.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들이나 논밭을 지나면 지금도 논둑이나 밭둑에 키 큰 화초가 보일 때가 있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풍경이다. 그런데 달맞이꽃이라는 이름을 듣고 난 뒤에는 노란 꽃이 보이면 한 번 더 보게 된다. 이름 하나를 알고 나서 달라진 것은 식물의 모양보다도, 길가를 지나갈 때 머무는 시선인 듯하다.

 

달맞이꽃은 외래에서 들어온 식물이라는 설명도 강의에서 들었다. 관련 자료에는 달맞이꽃이 외래식물로 소개되어 있고, 길가와 물가, 묵밭 같은 곳에서 자라는 귀화식물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내가 기억하는 논두렁과 하천 주변의 풍경도 이런 설명과 어딘가 이어져 보였다. 다만 주변에 노란 꽃이 핀다고 해서 모두 달맞이꽃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려 한다. 비슷한 꽃이 있을 수 있으니, 이름보다 먼저 실제 모습을 살피는 쪽이 낫겠다. 

 

자료에서 본 달맞이꽃은 저녁에 꽃이 피고 아침에 시드는 특징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나는 고향에서 본 꽃이 정확히 언제 피고 지는지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에는 소꼴을 하러 다니느라 꽃을 오래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기억 속 노란 꽃과 자료의 설명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기보다, 이름을 알고 난 뒤 그 풍경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는 사실만 남겨두려 한다.

 

영상 속 달맞이꽃을 처음 보았을 때도 한 번에 확신이 든 것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꽃은 멀리서 본 노란색과 키 큰 줄기 정도였기 때문이다. 논두렁에는 달맞이꽃 말고도 비슷한 높이의 풀이 자랐고, 하천가에는 다른 노란 꽃도 있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 말하는 고향의 꽃은 달맞이꽃이라고 배운 뒤 떠오른 장면이지, 그 시절 내가 이름을 확인한 기록은 아니다. 그 구분을 남겨 두고 싶다.

 

그럼에도 이름을 아는 일이 쓸모없지는 않다. 예전 기억을 정확한 답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 지나던 풍경에 질문 하나를 남긴다. 이 꽃은 언제 피는지, 어떤 곳에서 자라는지, 왜 이 자리에서 눈에 띄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달맞이꽃은 내게 그런 질문을 처음 남긴 노란 꽃이다.

지게와 낫을 들고 다니던 소꼴의 계절

달맞이꽃 이야기를 듣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소꼴을 하러 다니던 어린 시절이다. 우리 집에서는 소를 키웠다.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소가 먹을 풀을 베기 위해 논과 밭, 산으로 다녔던 기억이 있다. 지게를 지고 낫을 들고 풀이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지게를 진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당시에는 그저 해야 하는 일상처럼 여겼다.

 

풀이 많은 곳에 도착하면 낫으로 여러 종류의 풀을 베었다. 어느 풀은 이름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소가 잘 먹는 풀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했다. 강의에서 연한 잎을 소가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날의 풀더미 사이에 달맞이꽃도 섞여 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났다. 하지만 나는 당시의 식물을 하나하나 구별할 만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확실한 기억처럼 말할 수는 없다.

 

지게에 풀을 가득 싣고 산길을 오르내리면 어깨가 눌리는 듯 아팠다. 낫을 들고 다니며 풀을 베고, 다시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반복됐다. 풀의 이름보다 지게의 무게와 땀, 길가의 흙냄새가 더 선명하다. 그래도 소가 우리가 베어 온 풀을 잘 먹는 모습을 보면 나름의 보람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작은 일도 집안의 일과 이어져 있었다.

 

40년쯤 지난 지금, 노란 꽃을 보면 그때의 논과 밭, 산길이 함께 떠오른다. 소꼴을 하던 풀밭은 내게 식물 관찰 장소가 아니었다. 이름을 메모하거나 사진을 찍는 곳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식물이 있었는지 정확히 되짚어 보기는 어렵다. 다만 꽃과 풀을 한데 베어 지게에 얹던 시간이 있었고, 달맞이꽃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뒤 그 풍경 안에 노란 꽃 하나가 더해졌다.

 

그때는 약초라는 말도, 외래식물이라는 말도 내 생활과 멀었다. 소가 먹는 풀, 길가에 자라는 풀, 논둑에 피는 꽃 정도로만 나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 식물 이야기를 배우면서, 어린 시절에 그냥 지나친 풀마다 저마다의 이름과 자라는 방식이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달맞이꽃은 그때의 소꼴 기억을 다시 꺼내게 한 식물이다.

 

소꼴을 하러 나가는 날에는 계절에 따라 풀의 상태도 달랐다. 봄에는 막 올라온 풀이 연해 보였고, 여름으로 갈수록 풀의 키가 커져 낫을 움직이는 일이 더 많았다. 가을이 오면 길가의 색도 달라졌다. 나는 그 변화를 식물 이름으로 기억하지 않았지만, 풀을 베던 자리와 지게의 무게로 계절을 느꼈던 것 같다. 달맞이꽃이 그 풀밭에 실제로 섞여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노란 꽃이 있던 논둑의 풍경은 그 계절의 기억과 잘 어울린다.

 

집으로 돌아와 지게를 내려놓고 소에게 풀을 주던 모습도 떠오른다. 소가 풀을 먹는 동안에는 우리가 베어 온 풀이 어떤 이름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필요한 먹이를 마련했다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름을 모른 채 베었던 풀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의 나에게는 식물 공부보다 생활이 먼저였고, 그 생활 속에 풀과 꽃이 늘 함께 있었다.

이름을 알고 달라진 고향의 길가

약초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점은, 새로운 식물을 많이 외운다는 것보다 익숙한 풍경을 다르게 보게 된다는 데 있다. 달맞이꽃도 그렇다. 처음에는 이름만 들었고, 그다음에는 영상 속 식물을 봤다. 그러고 나서야 고향의 논두렁과 하천가에서 봤던 키 큰 노란 꽃이 떠올랐다.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식물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 아무 이름 없는 꽃으로 지나치지는 않게 됐다.

 

국립수목원 상담 자료에는 달맞이꽃이 7월에 피고, 저녁에 피어 낮에 지는 꽃으로 소개되어 있다. 식물 자료에는 달맞이꽃의 원산과 분포, 자라는 환경을 다르게 정리한 내용도 보인다. 이런 정보는 내가 실제로 본 꽃을 정확히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억 속 풍경을 완전히 대신하지는 못한다. 나는 고향에서 본 노란 꽃의 개화 시간까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달맞이꽃을 생각할 때는 자료에서 본 식물 설명과 내 기억을 따로 두고 싶다. 자료는 달맞이꽃이라는 이름의 배경을 보여주고, 내 기억은 소꼴을 하러 논밭을 오가던 시간으로 남는다. 둘을 무리하게 맞추기보다, 한 식물의 이름이 오래전 기억을 불러왔다는 정도가 지금의 기록에는 더 맞다.

 

오늘도 차를 타고 들이나 논밭 근처를 지날 때면 키 큰 노란 꽃이 보일 수 있다. 그때마다 그 꽃이 달맞이꽃인지 가까이서 확인하지 않은 이상 단정하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예전처럼 무심히 지나치는 대신, 꽃의 높이와 잎의 모양, 피어 있는 자리를 잠시 보게 될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소가 먹을 풀을 찾았다면, 지금은 그 풀과 꽃의 이름을 생각하게 됐다.

 

달맞이꽃은 내게 약재로 사용해 본 식물도 아니고, 직접 채취해 본 식물도 아니다. 다만 영상의 설명을 통해 이름을 알게 됐고, 그 이름이 고향의 논두렁과 지게, 낫, 소꼴을 실어 나르던 산길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노란 꽃 하나가 옛 풍경 속에서 뒤늦게 자기 자리를 찾은 것처럼 느껴진다.

 

달맞이꽃이라는 이름은 밤과 달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어린 시절 논둑에서 본 꽃은 낮의 풍경으로 남아 있는데, 자료에서는 저녁에 피는 특징을 설명한다. 이 차이도 내가 실제로 꽃이 피는 시간을 지켜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식물을 기억할 때 눈에 보이는 색과 높이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피는 시간, 잎의 모양, 자라는 자리처럼 내가 놓친 부분도 많다.

 

그래도 이름을 몰랐던 시절의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소꼴을 하러 다니며 보았던 풀밭은 그 자체로 내 삶의 한 장면이다. 지금의 나는 그 풍경을 식물 이름과 함께 다시 읽어 보는 사람일 뿐이다. 달맞이꽃은 과거를 새로 꾸미는 식물이 아니라, 오래전 들판에 있던 노란색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만든 식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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