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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의 이른 봄, 나무에서 떨어지던 고로쇠 수액

by jamkkum 2026. 9. 2.

봄철 약초원에서 본 고로쇠 나무
봄철 약초원에서 본 고로쇠 나무

순찰을 돌다 계곡 쪽을 보니, 나무마다 가느다란 호스가 연결돼 있었다. 호스 끝은 말통으로 이어졌고, 통 안에는 맑은 물처럼 보이는 것이 조금씩 모이고 있었다. 겨울 추위가 아직 남아 있던 때라 나는 두꺼운 군복 위에 야상까지 걸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왜 나무에 호스를 연결해 두었는지 알지 못했다. 가까이서 보니 민간인들이 나무와 말통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물어보니 고로쇠 수액을 받는 중이라고 했다.

 

민통선 안 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농사나 양봉, 나물과 약초 채취 허가를 받은 민간인들이 정해진 때에 드나들 수 있었는데, 고로쇠 수액을 받는 모습도 그때 처음 봤다. 겨울이 끝나 갈 무렵의 계곡은 아직 차가웠다. 나무에는 잎이 무성하지 않았고, 냇가 주변에는 겨울빛이 남아 있었다. 그런 곳에서 나무에 난 작은 자국과 호스, 말통이 이어진 모습은 평소 순찰에서 보던 풍경과 전혀 달랐다.

호스 끝의 말통

고로쇠 수액을 받던 사람들은 한 나무만 보고 있지 않았다. 여러 나무와 말통을 오가며 통 안을 살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수액은 한 방울씩이라 처음에는 통이 쉽게 차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말통 안에 모인 양이 눈에 띄었다. 나는 나무에서 저렇게 맑은 수액이 계속 나온다는 사실도, 방울이 모여 통을 채운다는 사실도 모두 신기했다.

 

순찰을 다니며 보던 계곡은 보통 경계 구역의 일부로만 기억된다. 그런데 그날은 나무에서 수액을 받는 사람들 때문에 같은 길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산과 냇가, 나무와 말통이 군 생활의 풍경 안에 함께 들어와 있었다. 허가를 받아 들어온 민간인들이 제 할 일을 하고, 우리는 순찰을 이어 가는 모습도 당시에는 낯설지 않으면서 묘하게 기억에 남았다.

 

나는 수액을 받는 일이 매년 반복되는 계절의 일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다만 아직 봄꽃도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가 비어 보이던 때에 말통으로 맑은 액체가 모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꽃이나 잎처럼 눈에 보이는 변화만 계절의 신호라고 생각했던 내게, 나무에서 수액을 받는 모습은 봄을 알리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국립산림과학원 자료를 찾아보니 고로쇠 수액은 겨울부터 초봄 사이에 주로 채취되며, 낮과 밤의 기온 차가 클 때 수액이 잘 나온다고 한다. 군복 위에 야상을 입고 계곡을 돌던 날의 차가운 공기와 수액 채취 풍경이 함께 기억나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말통에 모이던 첫맛

수액을 받던 분 가운데 한 분이 마셔 보라고 권했다. 그때까지 나는 고로쇠라는 이름도, 나무에서 받는 수액도 낯설었다. 컵에 조금 받아 든 수액은 겉으로 보면 맑은 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모금 마시니 아주 강한 맛은 아니었지만 약간 달게 느껴졌다. 물을 마신 것 같으면서도 물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내게 더 강하게 남은 것은 맛보다 그 장면이었다. 나무 몸통에서 호스를 지나온 수액을 바로 맛보는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군 생활 중 마시는 물은 정수된 물이나 보급된 음료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계곡 옆 나무에서 떨어진 것을 컵에 받아 마시는 경험은 낯설고 이색적이었다.

 

고참들 가운데에는 수액을 직접 받아 마시는 분도 있었고, 후임병에게도 맛을 보라고 권하는 분도 있었다. 처음 마신 사람들은 물과 비슷한데 조금 다르다고 말하곤 했다. 평소에는 근무와 일과가 정해진 시간에 이어지던 곳에서, 잠시 말통 주변에 모여 나무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 기억난다.

 

민통선 안의 계곡에서 여러 사람이 말통 주변에 모여 수액을 바라보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이색적이다. 누군가에게는 매년 반복되는 채취 작업이었겠지만, 내게는 처음 보는 자연의 장면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보다 눈으로 보이던 모습이다. 호스 안으로 투명한 수액이 이어지고, 말통 안에는 조금씩 양이 늘어났다.

울릉도에서 온 한 병

군 복무 시절의 고로쇠 수액은 그렇게 한 번 맛본 낯선 경험으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봄이 되면 장모님께서 울릉도에서 나는 고로쇠 수액을 보내 주실 때가 있다. 수액을 받을 때마다 먼저 감사한 마음이 든다.

 

군 시절에는 계곡 옆 나무와 말통을 보며 수액을 처음 알았다. 지금은 가족이 보내 준 한 병을 통해 그 이름을 다시 만난다. 두 경험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있지만, 투명한 수액을 보면 호스 안으로 이어지던 방울과 차가운 계곡 공기가 먼저 떠오른다.

 

장모님께서 보내 주신 수액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꺼낼 때면, 군 시절의 일과와는 전혀 다른 지금의 생활도 생각난다. 그때는 한 번 맛보고 지나간 일이었는데, 지금은 봄철이 되면 가족이 떠올려 보내 주는 물건이 됐다. 같은 이름의 수액이 서로 다른 시절을 이어 주는 점이 신기하다.

 

고로쇠 수액은 내게 봄이 오면 생각나는 음료이기도 하지만, 민통선 안의 순찰길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이기도 하다. 야상 깃을 세우고 걷던 길, 나무 옆 말통, 처음 맛본 한 모금, 그리고 지금 울릉도에서 건너오는 한 병이 고로쇠라는 이름 안에 함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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